올 들어 금융 당국의 개입으로 유상증자 계획이 무기한 밀리거나 규모가 대폭 축소된 사례가 15건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공개(IPO) 시장 역시 당국의 심사 강화로 위축돼 신규 상장 기업이 대폭 줄어들었다. 시장에서는 기업과 투자자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이뤄져야 할 증자가 사실상 허가제로 변모하면서 자금 조달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6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금융감독원의 정정 요구로 유상증자 기한이 밀리거나 규모가 줄어든 사례는 15건에 달했다. 한화솔루션은 올 4월 두 차례의 정정 요구를 받는 과정에서 당초 2조 4000억 원으로 계획했던 증자 규모를 1조 7000억 원으로 줄였다. 에코프로비엠은 6월 유상증자 신고서를 제출하며 10월 대금 납입을 마치려 했지만 금감원의 요구로 기일이 밀렸다. SK디앤디는 이달 5일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금감원이 정식으로 유상증자 신고서 정정을 요구하면 증자 절차는 전면 중단되고 기존 증권신고서의 효력도 소멸된다. 이 때문에 금감원이 정정 공시를 내기 전 사전 협의를 거쳐 자진 정정에 나서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례를 고려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지난해 삼성SDI는 유상증자 신고서를 수차례 자진 정정해 1조 6000억 원을 조달했다.
자본시장에서는 신고에 따라 진행할 수 있는 유상증자가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사실상 허가제와 같이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법상 유상증자는 신고서를 제출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금감원은 법규에 따른 형식 등을 갖추지 못한 신고서에 제한적으로 정정을 요구해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지만 최근 정정 요구가 기업의 재무 안정성이나 소액주주 보호 등 비정량 요건을 중심으로 폭넓게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즉, 기업의 유상증자 계획 발표로 주가 하락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증자의 가능 여부가 당국의 판단에 좌우되는 허가제에 가까워진 것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주주충실의무가 명문화됐기 때문에 주주 이익에 명백히 반하는 증자를 추진하기 애초에 어려운 상황”이라며 “당국이 소액주주 권익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지만 증자를 통한 펀더멘털 개선으로 지분가치가 중장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국 개입에 따라 1조 2000억 원 규모의 증자 일정이 밀리고 있는 에코프로비엠은 조달 자금 대부분을 신규 투자에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도네시아 제련소 지분 투자에 7650억 원, 헝가리 생산시설 투자에 1500억 원, 국내 양극재 생산시설 투자에 1500억 원을 투입해 중장기 생산능력을 확충하려 했지만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이달 정정 요구를 받은 SK디앤디는 재무 안정을 위해 자본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신용등급이 BBB-급으로 하향돼 시장성 차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가운데 우발채무가 발생했다. 이에 대주주가 자본 수혈에 나서려 했지만 일부 소액주주의 반발 속 금감원이 신고서 효력을 정지시키며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당국의 입김은 IPO 시장도 위축시키고 있다. 지난해 한국거래소에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했다가 자진 철회하거나 미승인 판정을 받은 기업은 27곳이다. 이 중 다수는 정량 요건을 충족했지만 거래소가 비정량 요건을 평가하는 ‘질적 심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올해 코스피 신규 상장 기업은 케이뱅크 1곳으로 연말이 돼도 지난해(7곳) 수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69개 기업이 신규 상장한 코스닥 시장에서는 올 들어 20개 기업만이 신규로 증시에 올랐다.
국내 자산운용사 대표는 “자본시장의 본질은 주식의 유통이 아닌 주식 발행을 통한 자본 조달”이라며 “자본 조달은 가급적 기업과 투자자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이뤄져야 하는데 당국의 통제가 과도하게 강해지며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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